블러
알렉스 제임스 x 데이먼 알반
데이먼 알반 x 그레이엄 콕슨
내가 너한테 반했다는 이야기를 벌써 했던가?
그 일을 그 때 바로 자각한 건 아니었다. 차라리 그 때 네가 귀엽다고 생각하고 경악하고 바로 깨달았다면 그 떄 멈췄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자각한 건 너에게 아주 단단히 빠진 후였다. 정말이지 통탄할 노릇이 아닐 수 없다. 내가 깨달은 건 아, 그래.
그 일이 있은 후 기적처럼 우리는 브릿팝이라는 이름으로 펑 하고 터져나갔다. 4집만에 이룬 쾌거였다. 우리의 노래는 거들떠도 보지 않던 사람들이 우리의 이름을 부르고 우리 노래에 열광했다. 무대 아래 함성소리는 더 커져갔고 우리를 인터뷰하려는 잡지나 방송이 넘쳐났다. 너는 자기 덕분인 줄 알라며 목에 힘을주고 다니기 시작했는데 사실은 내 다 괜찮을거야 라는 말이 진짜 힘을 발휘했다고 생각했는지 그 후로 종종 나에게 와서 괜찮을거라는 말을 해달라고 졸랐다. 그럼 나는 원하는 만큼 그 말을 해줬고 그럼 넌 만족한 듯 돌아갔다.
우린 정말 다 괜찮을 것 같았다. 빌어먹을 첫 매니저가 들고 튄 빚을 전부 갚고나서도 꽤 많은 돈을 벌어들였고 우린 우리만의 확고한 색을 가진 후여서 다음 앨범컨셉에대해서라던가에대해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. 돈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하고싶을 때 즐기면서 공연을 할 수 있었다. 무리하게 스케쥴을 잡지 않아도 되었고 그레이엄도 데이브도 전부 괜찮아 보였다. 나도 정말 끝내주게 괜찮았다. 나는 나에게 주목되는 관심을 즐겼고 너도 그런 것 같아 보였다.
전부 괜찮아지자 너는 깐깐한 모습을 던져버리고 어린애의 모습을 찾아갔다. 피자 몇판에 밴드이름을 바꾸거나 내가 얻어맞을 뻔한 일에 낄낄거리고 웃거나 하는 일 말이다. 너랑 나는 급속도로 친해졌고 너는 내 창문으로 돌을 톡톡 던지며 비밀스런 신호를 던졌다. 내가 창문을 열면 너는 천진한 얼굴로 웃고 있었고 나는 너에게 달려나갔다. 너와 술잔을 부딪히고 너는 데이브나 그레이엄에게 그랬던 것처럼 내 품을 파고들거나 하곤했고 나는 어느새 익숙하게 너를 내 다리사이에 끼우고 바닥에 주저앉아 티비를 보며 낄낄거렸다. 그러다가 네가 장난스레 내 볼에 입맞춘 순간 나는 몸이 튀어오를 듯 놀랐다. 사실 네가 하는 평소 행동을 생각하면 이상한게 아니었고 언젠가 그레이엄에게 그렇듯 네가 내 볼에 뽀뽀할 날이 올까 하는 생각도 한 적 있는데 그랬다.
"뭐야 싫으면 말로 해."
내가 튀어오르자 너는 즉각 반응했고 불퉁하게 한발자욱 나에게서 멀어졌다. 네 비죽하게 나온 입술은 내가 타이음식을 시켜준 후에야 들어갔다. 젓가락을 드는 그 순간까지도 나는 쿵쾅쿵쾅거리고 뛰어대는 심장을 주체하지 못해서 음식을 질질 흘렸고 데이먼은 젓가락질도 못하냐며(그러는 지 손 아래엔 음식이 더많이 떨어져 있었다.) 낄낄 웃어댔다.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네 웃는 얼굴 밖에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.
씨발 그 때 알았다는게 신기할 정도였다. 나는 너한테 단단히 반해있었다.
반했다는 걸 자각하고 나니 그 쉬웠던게 어려워졌다. 나는 너를 끌어안을 때 네 어깨에 손을 올려야하는지 아닌지도 몰라서 갈팡질팡했으며 네가 내 볼에 입맞추기라도 하면 볼에 데인듯 화끈거려 내 귀까지 발게지는 걸 막지 못했다. 네가 내 가슴에 기댄 채 무릎을 안고 티비를 볼 때면 티비화면이 아닌 네 뒷목만이 계속 보였고 창가에서 네가 돌을 던지진 않을까 기다리며 서성거렸다.
나는 몇날 며칠을 그렇게 첫사랑을 하는 십대 소년처럼 어수룩히 굴었고 그럴 때마다 너는 내 등을 팡팡 치며 머저리같다고 웃었다. 내 이런 이상한 행동을 데이브랑 그레이엄은 눈치챘는지 묘한 시선을 보냈는데 그러고나서야 나는 네가 내 마음을 눈치챘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겁을 먹었다.
그리고 며칠 간 나는 너를 만나지 않았다. 네가 창문을 두드려도 커텐을 쳤고 전화를 걸어도 꺼버렸다. 그러자 너는 단단히 화가 난 기세로 우리집 문을 쾅쾅 두드렸는데 나는 열고싶은 마음과 열고싶지 않은 마음이 부대껴 어떻게해야할지 몰라 발을 동동 맸다. 한 번도 여자가 모자라거나 그로인해 고민해보지 않았는데 정말이지 데이먼은 날 어떻게해야할지 모르게 만들었고 결국 내가 내리고 내린 결론은 너에게 고백하자는 것이었다.
주변에서 눈치챌 정도면 본인이 눈치채지 못했을 확률은 적었고(그랬다해도 귀뜸해주는 사람이 분명 있었을 테고) 그럼에도 나와 있었다는 건 희망고문을 하려는게 아니라면 나한테 마음이 있다는 소리로 여겨졌다. 나는 그날 저녁 데이먼을 저녁식사에 초대했다. 비싼 치즈와 값비싼 와인을 준비했고 스테이크도 구웠다. 너는 오자마자
"미안한건 아나보지? 전화 한 통 할 시간이 없었어?"
하고 세모눈을 뜨면서도 내가 구운 스테이크를 제대로 썰지도 않고 입에 밀어넣었고 나는 열심히 움직이는 네 입을 보며 와인만 홀짝이며 오늘 고백하고서 네 입술에 입맞춰도 될까 아닐까만 재고 있었다. 이윽고 긴 식사시간이 끝나고 우린 거실로 이동했다. 술한잔을 하자며 와인잔을 부딪친 너는 왠지 간지럽다고 웃었고 나는 슬쩍 네 어깨에 내 팔을 올려두었다. 그리고 어느정도 술이 들어갔다 싶었을 때 네가 먼저 말을 꺼냈다.
"사실 네가 보고싶었어."
네가 그렇게 말하자 심장이 정말 크게 튀었다. 나는 와인잔을 커피테이블에 내려두었고 네 눈동자를 뚫어져라 바라보앗다. 그러자 네가 부끄러운듯 살짝 웃었다. 지금 고백하려는 건가? 나는 고백을 하는 것과 받는 것 중 뭐가 나을지 재보다가 받는 쪽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그냥 침을 꿀꺽 삼키며
"왜?"
하고 물었다. 손바닥에 축축히 땀이 찼다.
"네가 말해줬으면 하는게 있거든."
그리고 너는 나와 눈을 맞췄다. 아 고백해달라는건가. 나는 바짝 말라가는 입술을 혀로 축였다. 입안이 바싹바싹 타는 것 같았다. 그러니까 지금 나한테 고백하라는건가? 좋아한다고 해야하는 타이밍? 내가 열심히 고백하다가 그게 맞다는 결론을 내리고 입을 막 벌렸을 때 데이먼의 말이 더 빨랐다.
"나 그레이엄한테 고백할건데 그레이엄이 뭐라고할지 모르겠어. 괜찮을거라고 좀 해줄래?"
그리고 너는 순수한 그러니까 내가 반해 마지않은 그 어린애같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. 나는 화도 차마 내지 못하고 그자리에서 멍해졌고 정신을 차리니 네가 돌아간 후였다. 애써 기억을 더듬으니 내가 너에게 괜찮을거라고 그레이엄도 너를 좋아하는 것 같다고 말해준 것 같았다.
허허 하고 헛웃음을 흘리며 접시랑 잔을 치웠다. 고민하고 고민하던게 바보같이 느껴졌다. 식기세척기에 접시들을 넣고 나서 그 자리에 주저앉아 사실 조금 울었다. 그제야 그레이엄의 눈빛이 이해가 되었다.
얼마 지나지 않아 데이먼은 그레이엄과 사귄다는 사실을 데이브와 나에게 통보해왔다. 그레이엄은 수줍게 웃었다가 내 눈치를 살짝 살폈는데 나는 일부러 오버해가며 데이먼과 그레이엄을 끌어안고 둘을 축하해주었다. 그리고 데이먼에게
"조심해라. 그레이엄 내가 채갈지도 몰라."
라고 으름장까지 놓았고 데이먼은 안되지 하면서 그레이엄을 꼭 끌어안았다. 나는 휘파람을 불었고 데이먼은 정말 또 천진하게 웃었기 때문에 그냥 화도 질투도 나지 않았다.
그래 내가 좋아하는 새끼들끼리 좋아하면 잘된거지 뭐. 나는 말도안되는 생각을 했고(더 웃긴건 진심으로) 그리고 우리는 축하하는 의미로 가벼운 술자리를 가졌다. 아 그래 그때였다. 맞아. 그래 그때였다. 네가 그렇게 말한게.
우리는 그 때 한창 싱글을 준비하고있었고 이미 한차례 성공으로 부풀어있었다. 네가 그 때 말했다. 바닥가가 보이는 곳에 커다란 집을 지을거라고. 우리 연습실이있고 너랑 그레이엄이 살고 악기를 두는 방과 신발을 두는 방, 음반을 두는 방들이 따로있고 데이브와 내 방이 있는. 그런 집 말이다. 스쳐지나가듯 말했지만 그 집은 정말 완벽해보였고 나에겐 이상향같은 존재가 되었다. 우리는 그 얘기에 웃었고 얼마 후 그 것의 발판이 될 싱글을 발매했다.
빌어먹을 오아시스가 싱글을 내는 날짜에 맞춰서 말이다.
신은 우리가 특히 데이먼이 행복을 누릴 시간을 존나 이만큼 주셨다. 보이나? 아차 너희는 안보이겠지. 내 손가락 한마디만큼 아주 요만큼 말이다.
우리에게 찾아온건 큰 성공과 평화로운 바닷가의 커다란 집이 아니었다. 데이먼에게 있어서 우리가 뜨지못했던 시기보다 더 어려웠던 어쩌면 제일 힘들었을 그래 그 시기가 찾아왔다. 브릿팝 전쟁 말이다.